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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될래






  소설 속의 인물에게 반하는 일은 늘 발생하는 일이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에 등장하는 요조, 헤르만 헤세의 작품《데미안》의 싱클레어와 데미안,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아, 정말 나는 조르바가 좋다), 그리고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에 나오는 니나 부슈만은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J. D. 샐린저의 경우에는 우스꽝스럽게도? 아니, 너무나 온당하게도! 그의 글을 좋아한다. 소설 속 주인공이 아닌, 문장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아니다. 그의 재치라고 말하는 게 좀 더 정확하고 옳은 표현인 것 같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이 매력적이지 않은 게 아니다. 하지만 나는 《아홉 가지 이야기》에 나오는 J. D. 샐린저의 재치가 훨씬 더 마음에 든다. 물론 재치 있는 작가를 말하자면 나는 알랭 드 보통을 가장 먼저 손에 꼽지만, J. D. 샐린저도 재치 있는 작가 중에 한 사람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언젠가 나는 그의 《아홉 가지 이야기》에서 벽에 대힌 이야기가 나오는 글을 읽었다. 한쪽 벽이 다른 한쪽 벽에게 "모퉁이에서 만나자!"라고 말했다는 문단이었다. 그 글을 읽는 나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아아, 벽은 모퉁이에서 다른 벽과 만난다. 모퉁이가 아닌 곳에선 그들은 만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발견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그와 사랑에 빠져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만큼은 J. D. 샐린저 만큼 매력적인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지금도 가끔 벽을 보면 나는 늘 J. D. 샐린저의 그 책이 생각난다. 그리고 모퉁이를 생각한다. 각진 곳, 그러나 그곳을 벽과 벽의 만남의 공간이라 생각하고 바라보면 마음이 묘해진다. 너네들이 여기서 만나고 있단 말이지. 마치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나자고 노래한 어느 시인이 있지만 너희들은 벽인 채로 만나고 있단 말이지, 하고 말이다.